(현장에서) 진우도의 슬픈역사 알고 계시는지요?
(현장에서) 진우도의 슬픈역사 알고 계시는지요?
  • 조영철 기자
  • 승인 2023.08.18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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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9월 12일 사하라태풍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슬픈 역사 가진 진우도, 천혜의 아름다운 모래 백사장, 한마디로 자연의 보물 창구다.

진우도의 슬픈역사 알고 계시는지요?

 

1959912일 사하라태풍으로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슬픈 역사 가진 진우도, 천혜의 아름다운 모래 백사장, 한마디로 자연의 보물 창구다.

 

진우도는 서낙동강 하구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유인도다. 부산시 강서구 신호동에서 1.2km이며 면적 0.8km

진우도 초대 자치시장은 강성갑 목사이다.

강성갑목사(1912-1953)진우도아동민주시라는 최초 지역자치시를 창립하고 1951년 아동민주도시 제 손으로 만든 현법을 만들었다. (1951.11.25 부산일보)

진우도아동민주시는 하나의 주민 자치시 형태로 자체 헌법도 있다. 그 조직을 보면 시장 의회 경찰국 산업국 병원 등의 기구까지 있어 민주국가 조직과 같다. 인구는 최하 6세부터 18세까지의 339여명의 남녀 전쟁고아들이다. 행정 장관인 시장은 2개월마다 한 번씩 개선하고 이때 18명의 시의원을 선거하여 선출했다. 경찰국에서는 25명의 경찰관을 두어 범죄를 단속하고 위생 검사를 시행하는가 하면 산업국이 생산 산업을 발전시키고 재무국에서는 자기를 끼리 통용하는 화폐를 발행했다. 주요 산업은 농사로 채소밭 2,500평과 5,000평의 밀밭을 개간하여 닭 소 말 돼지 토끼도 길렀다. 또 주변 바다에서 조개 재취 등 어업도 병행했다. 이들은 전쟁으로 고아된 과거의 역사는 잊어버리고 오직 현재와 미래의 벅찬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서 살았다.

 

2대 시장은 1951 이 섬에 처음 정착한 방수원(1904- ?)선생이며 진우도 이름을 명명하기도 했다. 그 당시 한국 전쟁을 도와준 16개국 연합군(UN)의 고마움을 참벗으로 기념하는 섬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진우란 참된 친구라는 뜻으로 참된 벗으로 진실한 친구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라는 뜻이다.

이 섬의 지도자 방수원 선생은 1904년생을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태어났다. 함석헌 현동완 등과 다석 류영모에 사사하였고 일제강점기 항일운도가로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다. 195610월에 원장직을 사임하고 진우도를 떠났다. 3대 시장은 기록이 없다. 그 후 5년간 자립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오고 있다.

 

진우도는 우리나라 최초 지방자치시 이었다는 대단한 기록이다. 특히 1954811일부터 14일 까지는 3일간보육원 아동올림픽을 개최했던 대단한 섬이다. 6.25 전쟁 이후 미8군에서 대규모 지원으로 전쟁고아를 위한 보육시설 올림픽이다.(대한뉴스 제 441954년 보육원 아동 올림픽대회) 진우도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신호동에서 1.2km 거리에 있다. 진우도 역사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백합양식장으로 운영해왔다. 생산한 백합은 전량이 일본으로 수매되었다. 또한 아주 특별한 일은 지하수 4-5개 중에 일본인이 파 우물만 아직도 바닷물이 아닌 순수한 물이 솟고 있다. 또한 더 놀라는 것은 중앙에 있는 건물 한 동이다. 1942년에 건립한 건물이며 수많은 태풍 비바람에도 건전하다. 사하라 태풍에 18동은 다 사라져도 오직 유일하게 일본인이 건립한 건물 한동만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다.

 

진우도는 강성갑목사, 방수원선생이 개척한 땅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김구 선생의 건국실천원 양성소의 교수진으로 참여하였고 6.25 전쟁이 터지자 향린원 원아들을 이끌고 가덕도 눌차 마을로 피난 왔다. 19513월 눌차 향린원 아이들 가운데 일부를 인솔하여 2개의 큰 천막으로 시작된 진우도 아동시설이다. 얼마 후 미8군 소속의 민간원조기구로부터 미화 45,000불을 지원 받고 미국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기존 천막 시설을 철거한 자리에 블록 콘크리트 건물 18개 동을 세우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보호대상 아이들의 진우도아동민주시라는 민주주의 생활 자치 공동체가 그것도 전쟁 중에 부모 잃은 아동들을 대상으로 진우도에 새보금자리한 것이다.

 

비극의 운명은 사하라태풍이다. 1959912일에 발생하여 917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였다. 심한 폭풍우에 휩쓸렸으며 사망 및 실종 849, 부상 2,533, 이재민 373,459명 선박피해 9,329, 경작지 유실 216,325 으로 한국의 남해안지역에 최고 최악의 기록이다. 진우도 또한 큰 피해 당했다. 사망 110명 건물 18채 완파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한마디로 초토화 되었고 한동안 무인도 되였다. 그런다가 1995년 다시 사람이 살면서 유인도가 되었다. 슬픈 역사 가진 진우도, 천혜의 아름다운 모래 백사장, 한마디로 자연의 보물 창구다. //

(조영철 강서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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