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비밀결사 근거지 사천 ‘다솔사’
독립 비밀결사 근거지 사천 ‘다솔사’
  • 환희 기자
  • 승인 2024.02.06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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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비밀결사 근거지 사천 다솔사

 

독립 비밀결사 근거지 사천 다솔사

 

만해가 말년에 다솔사로 온 까닭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만해 한용운의 호에 만 자가 들어가고, 만해(卍海)가 결성한 당이 바로 만당(卍黨)’이라는 사실이다. 만해는 만 자를 유독 좋아하였다. 만해는 히틀러를 좋아했나? 아니면 히틀러가 만해로부터 영감을 얻었단 말인가?

만당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비밀결사 조직이다. 노출되면 안 되는 조직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죽음을 수용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경지는 어떤 것인가? 이게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만해가 죽음을 생각하면서 떠오른 글자는 만 자였다고 짐작된다. 바로 영겁회귀이다. 죽어도 또 오는데 뭘 그렇게 삶에 연연한단 말인가! 사람이 죽으면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졌다가 다시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이 사바세계에 또 태어난다. 그러니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다가 죽자! 죽어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자! 우주의 이치가 그러하니까! ‘죽자가 반영된 철학이 만 자가 아닐까? 만해가 서울에 있었다. 서울에서 일경의 감시가 너무 심하고 운신의 폭이 줄어들었다. 그 압박을 느낀 만해는 여기저기 절들을 떠돌다가 말년에 지리산 남쪽에 있는 다솔사(多率寺)로 내려왔다. 과거에는 진주였지만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로 경남 사천시 곤명면에 있는 이 다솔사에서 만당을 작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왜 만해는 하필 다솔사로 왔을까? 다른 데 놔두고 말이다.

 

그 해답은 지리산 만다라에 있었다. 지리산 만다라의 개념을 필자에게 알려준 인물은 안동준(67) 전 경상대 교수이다. 도교 전문가이다. 도교뿐만 아니라 근대 한국 불교의 숨은 고수들과 비승비속의 도사승려들에 대해서 심도 있는 추적을 해왔다. 지리산 만다라는 지리산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해방구로 보는 관점이다. 지리산 자체가 작은 우주라는 것이다. 지리산은 가로 40세로 30의 구역이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넓은 산이다. 지리산 만다라에서 가장 중심은 법계사이다. 그 동쪽으로 대원사가 있고, 서쪽에는 화엄사가 있다. 북쪽에는 실상사, 그리고 남쪽에 다솔사가 포진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다솔사는 남쪽에 있으면서 지리산 전체의 도량을 모두 총괄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다솔사는 낙남정맥의 거의 끄트머리에 있다. 낙남정맥의 가장 끝은 금오산이고, 이 금오산으로 가기 전에 봉우리가 뭉친 산이 봉명산(鳳鳴山)이다. () 자가 들어가는 산은 봉우리가 철모나 바가지 엎어 놓은 것처럼 둥그렇게 보이는 산이다. 둥그렇게 보이는 봉우리는 봉황의 대가리로 본다. 봉우리가 좀 작으면 닭으로 본다. 봉우리 끝에 바위가 있고 날카롭게 보이면 독수리로 본다. 봉우리 끝의 바위가 독수리보다 덜 날카로우면 학()으로 본다. 장성 백양사 뒤의 약간 흰색을 띠는 바위 봉우리가 백학봉(白鶴峰)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학봉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승려들의 해방구 지리산

봉황이 운다는 이 봉명산 자락 아래에 다솔사가 위치하고 있다. 풍수상으로는 그리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두터운 육산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후덕한 터이다. 여러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터로 보인다. 다솔사 앞으로는 사천만(泗川灣)이 보인다. 다솔사 남쪽으로는 사천만이라는 바다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하동이고, 지리산이다. 사천만이라는 바다와는 대강 20여리 정도 될까. 과거에는 사천만을 통하여 뱃길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였다. 뱃길로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이 위험요소이기도 하였고, 교통의 편리함도 되었다. 고려 말~조선 초에 왜구들이 공격하기 쉽다는 점은 위험요소였다. 반대로 뱃길을 통하여 서남해안으로 통하기에는 아주 유리한 지점이었다.

안동준 교수에 의하면 왜구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다솔사는 역대로 무술승(武術僧)을 많이 배치하였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금강역사의 승려들이 과거부터 다솔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다솔사는 일종의 군사적 방어기지 역할도 담당했던 셈이다. 다솔사 터가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육산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 이름 자체가 많은 대중을 이끈다는 이름으로 정해졌다는 것도 납득이 된다. 그리고 많은 대중, 다솔(多率)은 무술승을 포함하여 유사시에 왜구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승병대(僧兵隊)가 여기에 해당한다. 승병대라! 평상시에 전투 훈련이 되어 있었던 승병대는 임진왜란 때의 서산·사명대사까지 소급된다. 평소에 훈련과 조직이 되어 있지 않으면 살육의 현장인 전쟁에 나갈 수 없다. 다 뺑소니 치고 만다. 자기 죽을 곳을 왜 가겠는가. 군사적인 훈련과 죽어도 좋다는 사생관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조선 승병은 이것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지하 비밀결사 조직이 바로 당취(黨聚)였다. 조선조에 억불정책이 실시되자 이에 반발한 승려들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승려들이 무력에 집중하게 되었다. 여차하면 유교 정권을 때려엎자! 그들은 미륵(彌勒)’을 신봉하였다. ‘() ()로 힘()을 길러 바꾸자(). 이것이 금강산 당취이다.

금강산 당취가 가장 과격한 그룹이었다면 이보다 100년쯤 늦게 지리산으로 들어온 승려 그룹이 지리산 당취이다. 금강산과 지리산은 조선시대 승려들의 해방구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서산대사가 지리산 당취들이 배출한 인물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필자가 이미 이 지면에서 설명한 바 있다. 서산은 지리산 당취들이 길러낸 인물이고 제도권 승과에서도 합격을 해서 30대에 서울 봉은사 주지도 지낸 바 있다. 제도권과 재야를 모두 통합하는 카리스마를 갖게 된 셈이다. 그 카리스마로 금강산에 가서 금강산 당취들도 규합하지 않았나 싶다.

지리산과 금강산을 통합하고 제3의 지점에 가서 잠수를 타면서 상황을 보던 지점이 묘향산이었다. 그래서 이북의 묘향산을 지리산의 장엄함()과 금강산의 빼어남()을 모두 갖춘 산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왜구가 남쪽으로 공략을 하면서 공격 루트가 사천만 쪽으로 들어오면 다솔사에서 막고, 섬진강을 통해서 들어오면 쌍계사, 피아골의 연곡사에서 막는다. 다솔사는 쌍계사나 연곡사에 비해 훨씬 입지조건이 좋다. 특히 식량 공급이 수월하다. 진주, 사천 일대의 물류 공급을 받기 유리한 지점이었다. 그러니까 승병조직, 당취들이 더 머무르기 좋은 지점이었다.

만당을 창립한 만해도 지하비밀조직인 당취의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란 때 왜구와 싸우던 승병조직 당취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만당으로 간판을 이어간 셈이다. 마지막 당취인 만해가 당취의 본부사찰 격이었던 다솔사로 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소신공양 의식했던 만해

만해가 다솔사에 와서 만난 인물은 김범부 선생이다. 왜정 때 당대의 석학이자 대가 센 인물이었다. 소설가 김동리의 친형이다. 안동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어느날 저녁에 만해와 김범부가 서로 주고받던 이야기를 24세의 청년 김동리가 듣게 되었다. 만해가 범부에게 소신공양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 이야기였다. 자기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제물로 드리는 행위가 소신공양이다. 스스로 타죽는 것이다. 베트남이 패망할 무렵 어느 불교 승려가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길바닥에서 스스로 타 죽는 모습을 보여 주는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의 소신공양이었다. 어찌 보면 무서운 죽음이다. 화형(火刑)이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우연히 듣게 된 소신공양 이야기에 김동리는 충격을 받았고 나중에 소설 등신불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만해는 항상 소신공양을 의식했던 것 같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 독립운동을 하게 되면 결국 죽음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고, 기왕 죽을 바에는 승려답게 소신공양의 길을 택하자. 그러자면 선배들이 걸어갔던 소신공양의 길을 답사해 보자.’ 이런 취지가 아니었을까. 다솔사에 오기 전에 만해는 금강산 당취의 본부였던 건봉사(乾鳳寺)에 있었다. 안 교수에 의하면 건봉사에는 소신공양대가 있었다고 한다. 숯에 벌겋게 달구어진 화로를 머리에 끼얹고 죽음을 택하는 대(). 그 소신공양대가 다솔사 뒤의 암자에 있었다는 게 안 교수 주장이다.

당시에 독립지사들의 살롱이었던 다솔사. 그 독립지사들이 마셨던 차를 공급하던 차나무들이 법당 뒤로 파랗게 싹을 틔우고 있다. 효당 최범술 선생이 이 차를 바탕으로 다솔사에서 차회를 열었던 것이 진주의 뜻있는 학인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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