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명의 한국전 참전UN군 후손돕기 장학사업 안내. 색소폰거리연주회(버스킹) 매월 첫째 둘째 토요일. 14:00~19:00/ 서면 영광도서 앞"
"200만명의 한국전 참전UN군 후손돕기 장학사업 안내. 색소폰거리연주회(버스킹) 매월 첫째 둘째 토요일. 14:00~19:00/ 서면 영광도서 앞"
  • 환희 기자
  • 승인 2023.09.15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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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3년 9월 2일 토요일 17~19시
▪️장소: 부산진구 부전로71 갤러리카페

200만명의 한국전 참전
UN군 후손돕기 장학사업 안내

색소폰거리연주회(버스킹)

한국전참전UN군 후손장학기금조성

▪️주 관: CBMC(기독실업인회)부산지회/ 한국전참전UN군후손장학회
▪️연주협찬: 한국프로색소폰중앙협의회/ 반올림색소폰동호회/ 소나무색소폰동호회
(매월 첫째/둘째 토요일 14:00~19:00/ 서면 영광도서 앞 분수대)
▪️저명음악가 초청공연 (매월 둘째 토요일 16:00~17:00)
1) 도용복(성악, 사라토가 회장, UN후손장학회 공동이사장)
2) 김지호(테너) - 이태리 3대 야외극장 "토레 델 라고" 극장 푸치니 페스트벌 출연,
-부산음악상 수상 및 부산예총공로상 수상 및 2018년 대한민국 신지식인 인증.
현)경성대학교 초빙교수, 부산성악가협회장
3) 박성환(바리톤 색소폰)- 대동병원장, 학교법인 화봉학원 이사장
4) 황용창(아코디언)
▪️연락 처: 051248-7012, 010-2318-9855 이학춘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명예교수)
▪️후원계좌: 국민은행 849501-01-323896새한국문화예술복지교육(기부금영수증발급)
▪️후원기업/단체: CBMC(기독실업인회) 부산지회, 주)사라토가, 프레전트무인카페, 미네르바온라인칼리지
○○○○○○○○●

경기도 오산시 “UN군 참전기념비”

미국군 참전비 비문에는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기간(1950~1953) 동안 미국의 아들들이 바친 고 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그들의 영령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여기에 비를 세워 기념하노 라’란 문구가 적혀있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국의

M COURTYARD 씨
참전초기에서부터 일생동안 왜미군이 한국땅에서 와서 싸워야 하느냐? ▲ 왜 우리가 이땅에 와서 죽어야 되는냐? 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한국땅에서 한국의 번영을 보고 “내가 이것을 위해서 이곳에 와서 싸웠구나. 이 나라의 백성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북한에는 이런 것이 없다... 한국에 온 것이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고 토로하였다.
이디오피아 셀라시에 황제는 황궁근위병 최정예 강뉴부대 6,000여명을 파견하여 253전 253전 승리를 거두고, 보화고아원 창설, 아이들을 돌보는 등 평화유지군의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6.25 전쟁 후 참전 용사와 그 가족은 생계 전선에서 밀려나면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그 이유 는 셀라시에 황제가 공산혁명으로 처형당하고 한국전 참전 이디오피아 파병군인에 대하여 계급을 박탈하고, 연금을 압류당했기 때문이다. 한국전 참전군인은 부상 등으로 생계를 꾸리지 못했고 자식 내외와 손자들과 살고 있지만 원화로 한달 3만원이 생활비의 전부이다.
한국 중소기업인 인프레시는 욕실용품을 주로 판매하는 친환경기업으로 줄기세포를 활용한 안 질환치료연구를 하는 기업인데 시각장애 에디오피아 참전용사에 대하여 시각수술을 지원하여 전체 에디오피아 국민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전참전 UN군용사 후손은 평생동안 할아버지로부터 한국문화와 한국의 발전상을 들었기 때문에 한국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에게는 단순한 보은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엄청난 국제적 인적자원이다. 향후 한국전참전 UN군 후손장학회는
▲ 모국에서 온라인한국어 학습기회제공
▲ 이학춘교수팀이 창안한 4개 외국어 동시학습법의 교육
▲ 국내 대학 초청 특별장학혜택 제공,
▲ 2중 국적 허용정책 제안
▲ 국내 장기체류 특별비자 혜택 제공
▲ “K- 언어 산업키부츠”창설 ▲K-스마트 농업 기술의 교육 및 수출지원
▲ 국내기업을 위한 외국인근로자 파견 지원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를 위하여 많은 국민들의 후원이 필요하다.

| 한국전참전 UN군 후손장학회

공동이사장 I
이학춘 (동아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명예교수),

도용복 (사라토가 회장),

나영수 (나눔과 기쁨 이사장)

S
미국 (M COURTYARD 씨의 감동스토리)

다음은 한국전 참전 병사 JM COURTYARD 씨의 이야기이다.

그는 1950년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열일곱 살에 징집 당했다. 그는 영등포 지역에 주둔해서 복무했는데 전방에서 후송되어 오는 팔다리가 끊어지고 다친 부상병들 이 밀려들었다. 당시에 미군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왜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싸워야 하느냐? 둘째 그리고 왜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죽어야 되는냐?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영등포에서의 주둔 생활이 끝난 후에 최전방으로 임무교대가 되었는데 위생병이기 때문에 미군이나 한국군이 전투 중에 쓰러지면 그 곳으로 기어서 갔는데 북한군과 중공군이 계속 사격을 하면 미군이 엄호사격을 해주었 고 그 사이에 기어가서 환자를 어깨에 메고 일어서서 걸어 나오지 못하고 기어서 메고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 했다.
그 후 제대해서 미국으로 돌아와 집으로 갔는데 그때부터 KOREA라는 K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고 누가 물어도 “한국이란 말은 하지마... 하지마...”하고 말했다. 결혼 후 자기 남편을 보니까 전쟁의 불안에서 빠져나 오지 못하였다. 1883년 한국에서 일하던 친구로부터 “한국에 함 와보라. 지금 한국은 많이 변했다. 아주 좋은 나라가 되어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서울에 갔을 때 거리에서 한 택시 운전사가 내 앞에 서더니 “혹시 한국전쟁에서 싸운 참전용사입니까?”하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니까 “타십시오 너무 감사합니다. 어디든지 원하시는 곳에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인천으로 가봅시다.” 인천까지 가서 “바닷가로 가봅시다.”하고, 바닷가에 가서 “잠깐 스톱”... 자기 부인에게도 친구에게도 “미안하지만 여기 좀 남아있으라. 여기서 부터는 혼자 가고 싶다.”하고는 오래전 한밤중 그믐날에 인천상륙작전을 했던 그 바다가로 가서 그냥 엉엉 울었다.
“내가 이것을 위해서 이곳에 와서 싸웠구나. 이 나라의 백성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북한에는 이런 것이 없다...” 한국에 온 것이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 감사함 밖에 없었다. 그의 아들은 말했다. “아버지가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자기 이름도 아버지 이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했다.

[한국전 숨은영웅]

18살에 나이 속여 입대했다.

“한국인 자유 위해 싸우려고"
종전 후에도 9개월간 전우 시신 1천여구 수습한 호주 참전용사 “이제 유튜브로 한국전 알려…

누군가 북한의 자유 위해 싸워줘야"
한국전 참전용사 케빈 존 바인햄 씨가 6.25 참전 당시 찍은 사진들.

[주시드니 한국 총영사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시드니=연합뉴스) 박의래 특파원

“당신이 자유를 원한다면 이를 위해 싸워야 하며, 자유를 얻었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불행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방식입니다.”
지난 7일(현지시간) 호주 시드니에서 만난 89세의 호주인 한국전 참전용사 케빈 존 바인행 씨는 한국과 호주의 후대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며 이같이 힘주어 말했다.

1933년 11월 호주 퀸즐랜드주에서 태어난 바인행 씨는 18세이던 1952년에 입대했다. 당시 호주에서는 해외로 파병되려면 19세가 넘어야 했고, 21세 미만이면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 나이 제한에 걸린 그는 자신의 나이를 22세로 속이고 입대했다. 그는 전장에서 주로 수색 작업을 했다. 순찰하며 호주군 전선에 숨어든 중공군과 북한군을 찾아내고 이들을 붙잡거나 사살해야 했다.
전선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색을 하던 도중 북한군 무리를 발견했다. 바인햄 씨 등은 총격전을 벌였고 북한군을 추격했다. 도망가던 북한군은 산속 작은 동굴로 몸을 숨겼고, 그는 동굴 속에 수류탄을 던져 사살했다. 이후로도 많은 전투 속에서 전우들이 죽었고 적과 싸우며 죽음이 일상인 전쟁터에 빠르게 적응했다.

바인햄 씨는 “자동화기를 사용하다 보니 막상 전투가 벌어져도 항상 순식간에 끝났고,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며 “전쟁터에서는 시신 썩는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금세 익숙해졌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전선에 배치된 지 2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라디오를 통해 그날 밤부터 모든 전투를 중단한다 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정전 이후에도 9개월여 더 한국에 남았다.

이 기간 총 대신 삽을 들고 전장에 서 숨진 전우들을 찾아 수습하는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서로 총을 겨눴던 북한군, 중공군과 함께 전사자를 찾는 작업도 했다. 바인햄 씨는 당시 중공군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는 담배를 나눠 피우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함께 숨진 동료를 찾았다. 1천구가 넘는 시신을 묻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호주로 돌아온 뒤에도 군에 남았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간 무력 분쟁인 일명 ‘보르네오 대치’ 때와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바인햄 씨는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섰던 나라는 22개국이지만 사람들은 주로 미군만을 생각한다”며 “사람들은 호주나 태국, 콜롬비아 등 여러 나라가 참전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제대로 된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나는 후손들에게 한국전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참여했고 희생했는지 알려주기 위해 책을 썼고 최근 에는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호주는 6.25전쟁 당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결정, 총 1만7천164명이 참전했다. 이 중 340명이 전사 하고 1천200여 명이 다쳤다.
그는 한국인이나 호주의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말에 “매우 간단하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바인햄 씨에게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자 “북한 문제는 전보다 더 복잡해 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들이 싸울 수 없다면 “누군가는 북한의 자유를 위해 싸워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70 년 전 한국을 위해 전쟁터에 나섰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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